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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중심 아름다운 바츨라프 광장. 햇살 좋은 봄과 여름날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3월 1일, 전국각지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결은 다르지만,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린 사건이 이 곳 프라하, 바츨라프광장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영화의 제목 '프라하의 봄', 어떤 사건인지, 우리나라의 삼일절과 비교하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산주의 개혁의 '둡 체크'

체코슬로바키아는 세계 2차 세계대전 이후 치러진 1946년 선거에서, 공산당이 총 300석 중 114석을 획득하며, 제1당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 후 40년간 공산당 일당 독재 체재가 진행되었고, 1950~60년대를 거치며, 많은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로부터 불만을 사게 됩니다.  1967년 당 내부에서까지 제1 당서기인 노보트니와 그 수뇌부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도 커졌습니다. 이후 공산당은 개혁파에 중심인 젊은 정치인 '알렉산드로 둡 체크'를 제1당 거시장으로 선출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노선을 외치며, 그동안 막혔던 언론 출판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의 개혁을 공표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역사적인 개혁 '프라하의 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최초로 정부에 대한 언론의 비판을 허용하였고, 이로 인해 TV와 라디오에서는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가감 없이 나오게 됩니다. 이와 같은 파격적인 정책의 실행에 이어 둡 체크는 서독을 포함한 서방 세계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스탈린의 통치 기간 동안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던 이들에 대한 재조명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뉴스와 라디오에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정부의 정책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오갔고, 국민들은 사회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며 더욱 풍요로워질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끝나버린 프라하의 봄

그러던 중 1968년 8월13일 둡 체크의 집무실에 전화기 소리가 울립니다. 소련의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즉각 개혁을 중단하고 국가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으라'라고 명령합니다. 이 전화를 받은 일주일 후 1968년 8월 20일 프라하의 봄을 빼앗기 위한 소련의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르샤바 조약 가입 국가인 불가리아, 폴란드, 그리고 헝가리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진입을 시작했고, 이때 동원된 군대의 수는 25만에 달했습니다. 압도적인 병력 앞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당국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서방국가들도 소련의 무력 행사 앞에 개입을 꺼렸습니다. 미국은 이때 베트남 전쟁 중이라,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소련연합군에게 유일하게 저항했던 이들은 바로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이었습니다. 시민들은 프라하로 향하는 탱크의 길목을 막아서고 국기를 휘날리며, 무력 침공에 대항하는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둡 체크는 모스크바로 끌려갔고, 140명의 시민이 사망합니다. 영화에서 보았던, 시민이 자신의 몸으로 탱크를 막는 장면은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국민들은 무력 침공을 감행한 소련을 비판하고 둡 체크의 복권을 요구하였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1968년 1월부터 8월까지의 프라하의 봄은 끝나게 됩니다. 

윈체즐라즈 광장에서 소련군 T-55 전차에 올라타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는 프라하 시민들

 

프라하의 봄과 삼일 운동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의 봄은 끝났지만, 이 사건으로 그들의 마음속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싹트게 됩니다.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비폭력 혁명'벨벳 혁명'이 일어납니다. 공산주의 정부에 대한 대규모 시위입니다. 이로, 민주 정부가 수립되고, 공산주의 통치가 종식되게됩니다.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는 시민 시위였습니다. 유관순 여사를 비롯하여 한국의 숨은 독립 운동가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평화시위를 계속해나갔습니다. 일본의 탄압으로 수천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또한 한국의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궁극적으로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이끌었습니다. 

프라하와 봄과  3·1 운동은 모두 정치적 자유와 독립을 위한 운동이었지만, 각각의 목표, 결과는 다릅니다. 프라하의 봄은 소련의 지배에 대한 반발로 기존의 정부 구조 내에서 자유를 확대해 감을 목표로 했고, 3·1 운동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자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군사개입으로 사망자가 생기고,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지만, 독립을 이루기 위한 기초를 다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내일 삼일절입니다. 어릴 땐 아파트 창문마다 태극기가 휘날렸던 것 같은데, 이젠 뜨문뜨문 보입니다. 집에 태극기가 있는지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감상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곧 올 2023년의 봄을 기다리며, 글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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